오랫동안 MVP는 비교적 명확한 절차를 가졌다.
사업 가설을 세우고, 이를 기획으로 구체화한 뒤, 디자인과 개발을 거쳐 최소한의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시장에 던져 반응을 본다. 이 과정은 스타트업이든 대기업이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MVP란 결국 잘게 나눈 단계들을 한 사이클로 묶은 방법론이었다.
하지만 2026년의 MVP는 더 이상 이 플로우를 따르지 않는다.
많은 팀에서 기획이 생략되거나, 디자인이 결과물로만 존재하거나, 개발이 곧바로 MVP가 되는 상황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흔히 “AI 때문에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하지만, 이 설명은 반만 맞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본질은 속도가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의 변화다.
MVP의 중간 단계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단계들이 존재해야 했던 전제 조건 자체가 붕괴된 것이다.
기존 MVP 사이클이 오랫동안 유효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 구조는 당시의 제약 조건을 가장 잘 반영한 결과였다.
첫째, 사람은 명확한 병목이었다.
기획은 사람이 해야 했고, 디자인은 시간이 걸렸으며, 개발은 비용과 리스크가 컸다.
그래서 각 단계는 분리될 수밖에 없었고, 역할 간 전달과 합의는 필수였다.
둘째, 변경 비용이 높았다.
기획이 틀리면 전체 일정이 흔들렸고, 디자인 수정은 곧 개발 재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충분히 생각한 뒤 만들자”는 논리가 합리적으로 작동했다.
셋째, MVP는 ‘작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기능을 최소화하고 범위를 제한해 리스크를 통제하는 것이 MVP의 핵심 가치였다.
이 모든 전제는 AI 이전 환경에서는 타당했다. 문제는, 이 전제들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AI는 기획, 디자인, 개발이라는 단계를 직접 없앤 것이 아니다.
AI가 없앤 것은 각 단계가 분리되어야만 했던 이유다.
기획은 더 이상 독립된 선행 단계가 아니다.
시장 리서치, 경쟁 분석, 유저 시나리오, PRD 초안까지 AI가 동시에 생성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획은 사업 아이디어와 거의 같은 시점에 발생한다.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UI는 결정의 결과물이 아니라 즉시 생성되는 산출물이 되었고, 수정 비용은 사실상 무시 가능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디자인은 검토의 대상이 아니라 실험의 일부가 된다.
개발은 더 극적으로 바뀌었다.
스캐폴딩, 컴포넌트 구조, 기본 로직까지 AI가 생성하면서 개발은 더 이상 “받아서 구현하는 단계”가 아니다.
문제 정의와 구현이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결과적으로 기존 MVP 플로우에서 중요했던 질문들은 힘을 잃는다.
- 어떻게 만들까?
- 얼마나 걸릴까?
- 이 정도 리소스로 가능할까?
이 질문들은 모두 제약을 전제로 한 질문이었다.
제약이 무너지자,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2026년의 MVP에서 살아남은 질문은 단 하나다.
“지금 이 문제를, 이 방식으로, 실체화할 가치가 있는가?”
AI는 무엇이든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만들었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MVP 환경은 더 잔인해졌다. 잘못 정의된 문제는 더 빨리, 더 명확하게 실패로 드러난다.
“리소스가 부족해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MVP의 성패는 이제 문제 정의의 정확도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 변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여기 있다.
만드는 것이 쉬워질수록,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졌다.
기술적 제약이 사라지면서, 거의 모든 아이디어가 ‘일단 만들어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선택의 기준이 더 중요해졌다.
실패가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AI MVP는 며칠 만에 시장과 충돌한다. 방향이 틀리면 곧바로 결과가 나온다. 판단의 질이 곧바로 성과로 연결된다.
결국 MVP는 더 이상 ‘실험을 위한 안전장치’가 아니다.
판단을 외부 현실에 강제로 노출시키는 도구가 된다.

이 흐름은 개인의 작업 방식만 바꾸지 않는다. 조직의 역할 분담 방식 자체를 재편한다.
과거에는 두 명, 세 명이 나눠 하던 역할이 이제는 한 명에게 집중된다.
기획과 개발, 판단과 실행을 잇는 중간 전달 역할은 점점 의미를 잃는다.
반대로, 문제를 정의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결과를 해석하는 역할은 극도로 중요해진다.
이건 인력 감축의 문제가 아니다.
책임의 재배치다.
AI 시대의 조직은 일을 잘게 나누는 조직이 아니라, 판단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선별하는 조직으로 변한다.
2026년 MVP 환경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인재는 특정 직무에 갇혀 있지 않다.
문제를 구조화할 수 있고 비즈니스, 사용자, 기술을 동시에 이해하며 AI를 도구가 아니라 사고 확장 장치로 사용하는 사람
이 사람은 기획자이기도 하고, 개발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사업가에 가깝다.
직무명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 밀도다.
AI는 실행을 평준화했지만, 판단은 평준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능한 한 명에게 더 많은 역할과 권한이 집중된다.
이제 MVP는 더 이상 “최소 기능 제품”이 아니다.
MVP란,
가설을 가장 빠르게 현실과 충돌시키는 장치다.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다. 속도 역시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적중률이다.
이 MVP가 정말 풀어야 할 문제를 겨냥하고 있는가, 그 하나다.
이 새로운 MVP 정의는 조직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기존 조직은 역할을 쪼개고 단계를 나누고 합의를 통해 움직였다.
하지만 AI MVP 환경에서는 전달 역할은 의미를 잃고 판단 역할은 집중된다.
그래서 조직은 이렇게 변한다.
일을 나누는 조직 → 판단을 맡길 사람을 고르는 조직
두 명, 세 명이 나눠 하던 역할은 능력 있는 한 명에게 자연스럽게 모인다.
조직 구조의 핵심은 인원 배치가 아니라 의사결정 권한의 배치가 된다.
빠른 MVP 환경에서 가장 위험한 조직은 결정권자가 불분명한 조직이다.
이 모든 변화의 끝에서 새로운 인재상이 등장한다.
2026년 MVP 환경에서 가치 있는 사람은
특정 직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인재는 기획자이면서 개발자이고 동시에 사업적 감각을 가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재다능함이 아니다.
AI를 통해 실행을 압축하고, 사람으로서 판단을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
직무명은 점점 의미를 잃고, 대신 문제 해결 밀도가 개인의 가치를 결정한다.
2025년에는 직무단위로 사람을 적게 뽑았다면, 이제는 직무가 아닌 기능단위로 사람을 적게 뽑은 시대가 될것이다.